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틴 학살 (문단 편집) === 1940년 4~6월 폴란드 포로의 학살 === NKVD는 1년간 포로와의 개별 인터뷰를 통해 개별 포로의 성향을 파악했다. 이후 NKVD의 수장 [[라브렌티 베리야]]는 1940년 3월 5일 반소적이거나 소련에 비협조적인 자들은 소련의 안보에 위험하니 즉시 제거하자고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의견을 상신했고 스탈린이 이를 승인함으로써 학살이 최종 결정되었다. 이후 폴란드군 포로들을 재분류하여 포로 2만 5,736명(1명 제외 전원 남성)을 카틴 숲을 비롯한 다른 지역으로 끌고 갔고 NKVD는 미리 암매장하려고 파 둔 여러 곳에서 이들 중 22,000여 명을 1940년 4월부터 5월까지 총살했다. 총살당한 이들 중 8,000여 명은 소련의 폴란드 침공 당시 소련에 포로로 잡힌 폴란드 장교였으며, 6,000여 명은 폴란드 경찰, 나머지는 폴란드 지식인이었다. 카틴에서만 4,400여 명, [[민스크]]에서 3,870명, [[하르코프]]에서 3,800여 명, 메드노예(Mednoye)[* 지금의 러시아 트베르주 칼리닌스키 지구에 있는 마을이다.]에서 6,300여 명이 학살당했다. 이외에 [[키이우|키예프]]와 [[헤르손]]에서도 학살이 벌어졌다. 카틴에서만 [[제독]] 1명, [[장군]] 2명, [[육군]] [[대령]] 24명, [[해군]] 대령 17명, [[중령]] 79명, [[소령]] 258명, [[대위]] 654명, [[하사관]] 3,420명, [[군종 신부]] 7명이 학살당했다. 또한 200여 명이 넘는 [[조종사]]와 [[대학]][[교수]] 20명, [[변호사]], [[기술자]], [[교사]] 수백여 명, [[난민]] 131명, 대[[지주]] 3명 등도 학살당했다. 카틴 이외에도 [[민스크]], [[하르코프]], 메드노예 등지에서 학살된 장교들의 숫자까지 합치면 '''장성급 인사만 14명이 학살'''당했다. 학살 피해자 중 8%는 폴란드 [[유대인]]이었다. 이러한 학살의 현장에서 막판 분류 작업으로 살아남은 천하의 행운아는 395명에 불과했다. 야니나 안토니나 레반도프스카(Janina Antonina Lewandowska, 1908 ~ 1940) 육군 중위를 제외하고 살해된 사람은 전부 [[남성]]이었다. 학살이 끝난 후 NKVD는 [[불도저]]로 이러한 시신을 흙으로 덮어 버려 사실을 은폐했고 그대로 모든 비극이 묻히는 듯했다. 공식적인 명칭은 "카틴 학살"이지만 실제로는 스몰렌스크 부근의 카틴에서만 학살이 일어난 것이 아니다. 카틴에서 죽은 사람들은 코젤스크 수용소에서 나왔고, 오스타시코프 수용소의 포로들은 [[모스크바]] 북부의 칼리닌 부근에서 학살되었으며 [[스타로벨스크]] 수용소의 포로들은 하리코프 부근에서 학살되었다. 카틴 숲에서 학살의 흔적이 최초로 발견되었기 때문에 카틴 학살로 알려졌을 따름이다. 또한 장교들뿐만 아니라 부사관들도 죽었는데 사망자 숫자로는 부사관 계층이 제일 많이 죽었다. "계급각성"이 이루어지 않는다고 판정한 노동자와 농민 출신 병사 250명도 학살되었다고 인정된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atyn_massacre_8.jpg]] 집단학살 현장에서 발견된 [[폴란드]] 육군 장교의 [[견장]]과 [[지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